30년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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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 추기경은 왜 개신교 왕에게 전쟁 자금을 댔을까

1631년 프랑스와 스웨덴이 맺은 한 장의 계약은 30년 전쟁을 ‘종교전쟁’이라는 말만으로 설명하기 어렵게 만듭니다. 프라하 성 창문에서 시작된 반란은 왜 유럽의 권력 질서를 다시 짜는 전쟁으로 번졌을까요?

1631년 1월 23일, 포메라니아의 베르발데에서 프랑스와 스웨덴 사이에 조약이 맺어졌습니다. 스웨덴 왕 구스타브 2세 아돌프는 독일 전선에 보병 3만 명과 기병 6천 명을 유지하기로 했고, 프랑스 왕실은 5년에 걸쳐 보조금을 지급하기로 약속했습니다.1

계약 당사자만 놓고 보면 이상한 조합이었습니다. 프랑스 외교를 움직이던 아르망 장 뒤 플레시 드 리슐리외는 추기경이었습니다. 프랑스는 가톨릭 국가였죠. 반면 구스타브 아돌프는 유럽 개신교 진영에서 가장 강력한 군주 가운데 한 사람이었습니다. 스웨덴군이 맞서려던 상대는 가톨릭 합스부르크 황제 페르디난트 2세였습니다.

가톨릭 프랑스가 개신교 스웨덴의 전쟁을 돈으로 떠받친 겁니다.

30년 전쟁을 가톨릭과 개신교가 30년 동안 싸운 전쟁이라고만 기억하면 베르발데 조약은 설명하기 어렵습니다. 종교가 그렇게 중요했다면 리슐리외는 왜 같은 가톨릭 진영을 돕지 않았을까요. 반대로 권력과 영토만 중요했다면 1618년 보헤미아 사람들이 목숨을 걸고 종교적 권리를 지키려 했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요.

역사가 피터 H. 윌슨이 30년 전쟁 원인을 둘러싼 여러 학설을 검토하면서 강조했듯, 종교·신성로마제국 헌정 질서·합스부르크 왕조 이해·유럽 강대국 경쟁을 하나만 골라 나머지를 지우기는 어렵습니다.2 전쟁은 종교 때문에 시작됐지만 종교만으로 계속되지 않았고, 왕조가 싸웠지만 왕조만으로 움직이지도 않았습니다.

창문 아래에서 살아남은 세 사람

베르발데보다 13년 전인 1618년 5월 23일, 프라하 성 보헤미아 왕실 관청 안에는 전혀 다른 종류의 긴장이 흐르고 있었습니다.

보헤미아 개신교 귀족들은 자신들이 누리던 종교적 권리가 무너지고 있다고 판단했습니다. 불안에는 문서로 남은 근거가 있었습니다. 1609년 황제 루돌프 2세가 내린 이른바 ‘종교 자유 칙서’ 또는 ‘폐하의 칙서’(Letter of Majesty)는 보헤미아의 비가톨릭 신앙 공동체에 상당히 넓은 종교 활동 권리를 보장했습니다. 교회를 세우고 예배를 드릴 권리뿐 아니라, 강제로 다른 신앙을 받아들이게 해서는 안 된다는 내용까지 담겼습니다.3

문제는 합스부르크 가문 페르디난트가 보헤미아 왕위에 오른 뒤였습니다. 독실한 가톨릭 군주였던 페르디난트가 기존 종교 질서를 얼마나 존중할 것인지 개신교 귀족들은 의심했습니다. 몇몇 개신교 교회를 둘러싼 분쟁과 왕실 대응은 종교 자유 칙서가 실제로 지켜질 수 있는지를 시험하는 사건이 됐죠.

5월 23일, 무장한 귀족들이 프라하 성에 들어갔습니다. 보헤미아 왕실 총독 빌렘 슬라바타와 야로슬라프 보르지타 폰 마르티니츠가 표적이 됐습니다. 당시 기록에는 귀족들이 두 사람을 방 안에서 창가까지 끌고 간 뒤 성 밖으로 던졌다고 적혀 있습니다. 이어 왕실 서기관 필리프 파브리키우스도 같은 창문 밖으로 떨어졌습니다.4

세 사람은 살아남았습니다.

가톨릭 쪽 기록은 성모 마리아가 추락을 막았다는 기적담까지 남겼습니다. 후대에는 성 아래 쌓인 거름더미가 목숨을 구했다는 설명도 널리 퍼졌지만, 당시 기록만으로 생존 원인을 단정하기는 어렵습니다. 확인할 수 있는 사실은 세 사람이 높은 창문에서 떨어지고도 살아났고, 창문 밖으로 사람을 던진 정치적 폭력이 되돌릴 수 없는 선을 넘었다는 점입니다.

보헤미아 귀족들은 페르디난트를 왕으로 인정하지 않고 팔츠 선제후 프리드리히 5세를 새 왕으로 세웠습니다. 반란은 오래 버티지 못했습니다. 1620년 11월 8일 프라하 인근 백산 전투에서 보헤미아군이 패했고, 프리드리히는 도망쳤습니다. 이후 전쟁은 팔츠로 번졌고, 1623년 프리드리히가 갖고 있던 선제후 지위까지 가톨릭 바이에른의 막시밀리안 1세에게 넘어갔습니다.5

여기까지만 보면 황제가 이긴 전쟁처럼 보입니다. 반란은 진압됐고, 합스부르크 군사력은 강해졌으며, 가톨릭 진영은 잃었던 땅까지 되찾을 기회를 잡았습니다.

하지만 승리가 다음 전쟁을 불러왔습니다.

승리한 황제가 너무 많은 것을 돌려놓으려 했을 때

1625년 덴마크 왕 크리스티안 4세가 전쟁에 뛰어들었습니다. 덴마크 왕은 루터교 군주였지만 신앙만 보고 남쪽으로 내려온 것은 아니었습니다. 신성로마제국 북부와 엘베·베저강 유역에서 영향력을 유지하려는 왕조 이해가 종교 문제와 겹쳤습니다. 황제 쪽에는 요한 체르클라에스 폰 틸리와 새롭게 부상한 알브레히트 폰 발렌슈타인이 있었습니다. 덴마크는 밀렸고 1629년 전쟁에서 빠져나갔습니다.

페르디난트 2세 앞에는 다시 한번 전쟁을 끝낼 기회가 놓였습니다.

황제가 택한 문서는 ‘복구령’이었습니다. 1629년 3월 6일 선포된 복구령은 1555년 아우크스부르크 종교화의 이후 개신교 세력이 장악한 가톨릭 교회 재산을 되돌리려는 조치였습니다. 적용될 경우 가톨릭 측으로 넘어갈 대상에는 주교령 십여 곳과 수도원·교회 재단 수백 곳이 포함될 수 있었습니다. 칼뱅파는 아우크스부르크 종교화의에서 합법 종파로 인정받지 못했다는 점도 복구령에서 다시 확인됐습니다.6

종교 문제만큼 위험했던 대목은 절차였습니다. 페르디난트는 신성로마제국에서 중요한 입법 창구였던 제국의회의 합의를 거치지 않고 황제 권한을 앞세웠습니다. 개신교 제후들이 보기에 복구령은 교회 재산 몇 곳을 되찾는 조치가 아니었습니다. 황제가 전쟁에서 얻은 군사적 우위를 이용해 제후들이 누리던 정치적 권한까지 줄일 수 있다는 신호였죠.

페르디난트의 승리는 전쟁을 끝낸 게 아니라 다음 참가자를 불러들였습니다.

1630년 여름, 스웨덴 왕 구스타브 2세 아돌프가 포메라니아에 상륙했습니다. 황제 세력이 발트해 가까이까지 올라온 상황은 스웨덴에게도 부담이었습니다. 스웨덴은 개신교 세력을 보호한다는 명분을 내세울 수 있었고, 동시에 발트해 주변에서 확보한 전략적 위치를 지켜야 했습니다.7

그리고 몇 달 뒤 베르발데에서 프랑스 돈이 스웨덴 전쟁에 연결됐습니다.

리슐리외에게 중요한 경계선은 가톨릭과 개신교 사이에만 있지 않았습니다. 프랑스 동쪽에는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가 있었고, 남쪽과 북동쪽에는 스페인 합스부르크 세력이 버티고 있었습니다. 스페인과 오스트리아 두 합스부르크가 서로 지원하며 프랑스를 압박하는 상황을 막는 일은 프랑스 외교에서 중요한 과제였습니다. 그래서 가톨릭 추기경은 루터교 국왕에게 돈을 보낼 수 있었습니다.

그렇다고 구스타브 아돌프가 종교에 관심 없는 용병이었다고 쓰는 것도 맞지 않습니다. 종교적 신념, 스웨덴 안보, 왕조 이해, 발트해 세력권이 한 사람의 선택 안에서 동시에 작동했습니다. 30년 전쟁을 흥미롭게 만드는 지점도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사람들은 ‘신앙 아니면 국익’ 가운데 하나만 고르고 움직이지 않았습니다.

1631년 브라이텐펠트에서 구스타브 아돌프 군대가 틸리 군대를 무너뜨리면서 전황은 크게 바뀌었습니다. 스웨덴은 독일 깊숙이 내려갔습니다. 하지만 구스타브 아돌프는 1632년 뤼첸 전투에서 전사했습니다. 스웨덴은 전쟁을 계속했지만 1634년 뇌르틀링겐 전투에서 큰 패배를 당했습니다.8

또 한 번 전쟁을 끝낼 기회가 왔습니다.

1635년, 끝날 수 있었던 전쟁

1635년 페르디난트 2세와 작센 선제후 요한 게오르크 1세는 프라하에서 평화 협정을 맺었습니다. 여러 독일 제후가 뒤따랐습니다. 1629년 복구령이 만들어낸 갈등도 상당 부분 뒤로 물러났습니다. 황제는 독일 개신교 세력 상당수와 다시 타협할 가능성을 얻었죠.9

전쟁이 가톨릭과 개신교 사이에서만 벌어진 싸움이었다면 프라하 화의는 훌륭한 종착점이 될 수 있었습니다.

프랑스가 계산한 위험은 정반대였습니다.

독일 제후들이 황제와 화해하고 스웨덴까지 밀려나면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는 다시 힘을 모을 수 있었습니다. 스페인 합스부르크와 협력할 여지도 커집니다. 프랑스 입장에서 신성로마제국 안에서 평화가 찾아오는 일이 곧 프랑스 안보에 좋은 소식이라는 보장은 없었던 겁니다. 프라하 화의를 연구한 역사학자 토비 오즈번도 프랑스가 합스부르크의 승리로 이어질 가능성을 우려해 군사 개입을 오히려 확대했다고 설명합니다.10

1635년 5월 프랑스는 스페인에 선전포고하며 합스부르크와 공개 전쟁에 들어갔습니다. 스웨덴과 협력 관계도 이어갔습니다. 가톨릭 프랑스와 개신교 스웨덴이 합스부르크 세력을 상대로 전쟁을 계속하면서 ‘종파별 두 진영’이라는 도식은 더 이상 전장을 제대로 설명하지 못했습니다.

그렇다고 1635년 어느 날 종교전쟁이 갑자기 ‘근대적 국가 전쟁’으로 변신했다고 말하면 또 다른 단순화가 됩니다. 종교는 끝까지 협상 대상이었습니다. 1648년 평화조약에서 어느 종파를 합법적으로 인정할지, 교회 재산을 어느 시점을 기준으로 돌려놓을지에 긴 조항이 필요했다는 사실 자체가 종교 문제가 살아 있었다는 증거입니다.

달라진 것은 종교가 사라진 게 아니라 동맹을 결정하는 유일한 기준이 될 수 없게 됐다는 점입니다. 신앙과 왕조, 영토와 재정, 제후의 자치권, 유럽 세력 균형이 한 전쟁 안에서 서로 부딪치기 시작했습니다.

전투보다 더 많은 사람을 죽인 것

30년 전쟁을 설명할 때 가장 자주 등장하는 숫자 가운데 하나가 ‘800만 명 사망’입니다. 또 ‘독일 인구 30%가 사라졌다’거나 ‘독일 남성 절반이 죽었다’는 표현도 반복됩니다.

참상이 컸다는 사실은 의심하기 어렵습니다. 다만 17세기 유럽에는 오늘날과 같은 인구통계 체계가 없었습니다. 지역마다 기록 수준도 달랐고, 전쟁이 끝난 뒤 인구 감소가 전투 사망, 질병, 기근, 피난 가운데 어디에서 얼마나 비롯됐는지를 분리하기도 어렵습니다. 그래서 단일 숫자를 확정된 사망자 수처럼 쓰는 데에는 주의가 필요합니다.

2023년 Climate of the Past에 실린 종합 연구는 신성로마제국 인구를 전쟁 직전 약 1,600만~1,800만 명, 1650년 무렵 약 1,000만~1,200만 명으로 추정한 기존 연구를 정리합니다. 연구자들은 전체 감소 폭을 약 25% 수준으로 제시하면서, 다른 연구에서는 35~40%까지 추산한다고 덧붙였습니다. 메클렌부르크·포메라니아·팔츠와 튀링겐·뷔르템베르크 일부처럼 집중적으로 전쟁을 겪은 곳에서는 인구 손실이 50%를 넘은 사례도 있었습니다.11

숫자보다 중요한 대목은 사망 방식입니다.

군대가 지나가면 사람만 죽는 게 아니었습니다. 농지가 망가지고 가축이 사라졌습니다. 군대 유지에 필요한 세금과 현물 부담이 주민에게 떨어졌습니다. 주민이 도시로 피난하면 좁은 공간에 인구가 몰렸고, 병사와 피란민 이동로를 따라 페스트와 각종 전염병도 움직였습니다. 흉작과 추위 같은 기후 충격은 전쟁이 이미 망가뜨린 식량 공급망과 겹쳤습니다. 연구자들이 30년 전쟁의 인구 재앙을 전투 사망자만으로 설명하지 않는 이유입니다.12

용병제가 참상을 키운 요소 가운데 하나였지만, ‘용병이어서 무조건 무질서했다’는 설명도 충분하지 않습니다. 당시 군대는 봉급과 보급을 안정적으로 확보하기 어려웠고 점령지에서 군세금과 식량을 조달하는 방식에 크게 의존했습니다. 전쟁이 길어질수록 같은 지역이 여러 군대에 반복해서 뜯겼습니다. 국가가 군대를 더 많이 동원할수록 주민 생활은 군사재정 체계 안으로 빨려 들어갔죠.

30년이라는 시간은 도시 하나가 불타는 장면보다 더 무서운 결과를 만들었습니다. 한 해의 약탈이 끝나도 다음 해 농사를 지을 씨앗과 가축이 없고, 가족이 피난에서 돌아오지 않으며, 장터를 잇던 길 위로 또 다른 군대가 지나갔습니다.

전쟁은 그런 식으로 일상이 됐습니다.

두 도시에서 만든 평화

1640년대가 되자 어느 한쪽이 상대를 완전히 굴복시킬 전망은 희미해졌습니다. 평화 협상은 베스트팔렌 지방의 뮌스터와 오스나브뤼크 두 도시에서 진행됐습니다. 1648년 10월 24일 오스나브뤼크에서는 황제 페르디난트 3세와 스웨덴 및 동맹 세력 사이 조약이, 뮌스터에서는 황제와 프랑스 및 동맹 세력 사이 조약이 체결됐습니다.13

종교 문제는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30년 동안 싸워도 없애지 못한 종교적 차이를 어떤 규칙으로 관리할지가 조약 한가운데 들어왔습니다.

1555년 아우크스부르크 종교화의가 인정했던 가톨릭과 루터교에 더해 개혁교회, 곧 칼뱅파가 합법 종파로 인정됐습니다. 교회 재산과 종교 상태를 정리할 기준일로 1624년 1월 1일이 채택됐습니다. 자기 영주와 다른 신앙을 가진 주민에게도 일정한 양심과 사적 예배 권리가 보장됐습니다.14

제후들의 정치적 지위도 달라졌습니다. 제국 영방들은 외국 세력과 동맹을 맺을 권리를 확인받았습니다. 하지만 조건이 붙었습니다. 동맹은 황제와 신성로마제국, 공공 평화에 맞서서는 안 됐습니다. 영방 군주들이 1648년부터 황제와 아무 관계 없는 완전한 독립국가가 됐다는 뜻은 아니었던 셈입니다.15

스위스 여러 주가 제국 법정 관할에서 벗어나 있다는 사실도 조약에 명문화됐습니다. 네덜란드 공화국은 같은 베스트팔렌 평화협상과 나란히 진행된 스페인과의 별도 뮌스터 평화에서 독립을 인정받아 80년 전쟁을 끝냈습니다. 해당 조약 비준 행사는 1648년 5월 15일 뮌스터 시청에서 열렸고, 화가 헤라르트 테르 보르흐가 현장을 그림으로 남겼습니다.16

스웨덴은 포메라니아 일부와 비스마르, 브레멘·페르덴 등 제국 안의 영지를 확보했습니다. 프랑스 역시 알자스 일대에서 합스부르크가 보유하던 여러 권리를 넘겨받았습니다. 신성로마제국 안에서는 황제와 제후 사이 권한 배분이 다시 규정됐습니다.

하지만 신성로마제국은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제국은 1648년 뒤에도 150년 넘게 존속했고 1806년에야 해체됐습니다.

베스트팔렌은 정말 ‘근대 국가’를 만들었을까

국제정치 교과서에서 베스트팔렌 조약은 오랫동안 아주 선명한 경계선으로 그려졌습니다. 중세의 교황·황제 중심 질서는 1648년에 끝났고, 서로의 내정에 간섭하지 않는 독립 주권국가 체제가 그날 시작됐다는 설명입니다.

문제는 실제 조약문이 그렇게 깔끔하지 않다는 데 있습니다.

국제관계사 연구자 안드레아스 오지안더는 ‘베스트팔렌 체제’를 근대 주권국가가 탄생한 순간으로 보는 관점이 19~20세기 주권 개념을 과거에 투영한 결과라고 비판했습니다. 데릭 크록스턴 역시 조약을 자세히 읽으면 오늘날 말하는 주권 원칙을 선언한 문장을 찾기 어렵다고 지적합니다. 독일 제후들도 1648년 이후 황제와 제국에서 완전히 독립한 존재로 행동하지 않았습니다.17

베스트팔렌은 근대 국가를 하루 만에 발명한 조약이 아니었습니다.

그렇다고 1648년이 중요하지 않았다는 뜻도 아닙니다. 베스트팔렌 평화는 황제와 제후가 공유하던 복잡한 권력 구조를 다시 정리했고, 세 종파가 함께 살아갈 법적 틀을 만들었습니다. 영방 군주가 대외관계에서 움직일 공간도 넓어졌습니다. 무엇보다 수많은 정치 주체가 장기간 협상하고, 전쟁에서 승리한 한쪽이 상대 종교를 없애는 대신 서로 존재할 수 있는 조건을 문서로 정했다는 경험이 남았습니다.

‘근대 국가 탄생’이라는 한 문장보다 흥미로운 변화는 조금 느리고 모호합니다. 유럽에서 왕조·제후·도시·교회·제국처럼 권한이 겹치는 옛 질서는 여전히 살아 있었지만, 어느 한 신앙이나 어느 한 황제가 유럽 정치 전체를 지배하기는 갈수록 어려워졌습니다. 서로 다른 정치 주체가 공존하려면 전쟁에서 완전히 이기는 것보다 협정으로 차이를 관리해야 한다는 현실도 선명해졌죠.

1631년 베르발데에서 작성된 문서로 돌아가면 처음 느꼈던 모순도 조금 다르게 보입니다.

리슐리외는 가톨릭 신앙을 버려서 스웨덴을 지원한 게 아니었습니다. 구스타브 아돌프 역시 개신교 신앙을 가장한 채 돈만 좇은 군주라고 보기 어렵습니다. 두 사람은 종교가 매우 중요했던 시대에 살았지만, 종교만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권력 관계 안에서 선택했습니다.

30년 전쟁은 종교전쟁으로 시작했다가 어느 날 갑자기 ‘국익을 위한 전쟁’으로 바뀐 사건이 아니었습니다. 종교적 신념과 정치적 이해가 서로 다른 방향을 가리킬 때 군주와 제후들이 무엇을 택했는지 보여준 전쟁에 가까웠습니다.

1618년 프라하에서 귀족들은 종교적 권리를 지키겠다며 사람을 창문 밖으로 던졌습니다. 1631년 가톨릭 프랑스는 개신교 스웨덴에 돈을 보냈습니다. 1648년 협상가들은 어느 쪽 신앙이 진짜인지를 판결하는 대신 세 종파가 한 제국 안에서 어떻게 버틸지를 문서에 적었습니다.

30년 동안 달라진 것은 사람들이 신앙을 믿지 않게 된 게 아니었습니다.

신앙만으로 유럽을 통치할 수 없다는 사실을 너무 많은 죽음을 치르고 확인한 것이었죠.

주석

  1. Svante Norrhem, “The Uses of French Subsidies in Sweden, 1632–1729,” in Subsidies, Diplomacy and State Formation in Europe, 1494–1789: Economies of Allegiance, ed. Svante Norrhem and Erik Thomson (Manchester: Lund University Press, 2020), 93–117, JSTOR.
  2. Peter H. Wilson, “The Causes of the Thirty Years War 1618–48,” The English Historical Review 123, no. 502 (June 2008): 554–586, https://doi.org/10.1093/ehr/cen160.
  3. German History in Documents and Images, “The Bohemian Religious Peace (July 1609),” English translation from C. A. Macartney, The Habsburg and Hohenzollern Dynasties in the Seventeenth and Eighteenth Centuries (1970), accessed August 24, 2026, German History in Documents and Images.
  4. German History in Documents and Images, “The War Begins—The Defenestration of Prague (May 1618),” trans. Ellen Yutzy Glebe, source text in Documenta Bohemica Bellum Tricennale Illustrantia, vol. 2 (Prague: Academia; Vienna-Cologne-Graz: Hermann Böhlaus Nachf., 1972), 42–49, accessed August 24, 2026, German History in Documents and Images.
  5. Rudolf Brázdil et al., “Weather and Climate and Their Human Impacts and Responses during the Thirty Years’ War in Central Europe,” Climate of the Past 19 (2023): 1863–1890, esp. section 2, https://doi.org/10.5194/cp-19-1863-2023.
  6. German History in Documents and Images, “The Catholic Triumph—The Edict of Restitution (March 6, 1629),” trans. Thomas A. Brady Jr., accessed August 24, 2026, German History in Documents and Images.
  7. Brázdil et al., “Weather and Climate,” 1863–1890; Norrhem, “Uses of French Subsidies,” 93–117.
  8. Brázdil et al., “Weather and Climate,” 1863–1890.
  9. Toby Osborne, “Peace of Prague (1635),” in The Encyclopedia of Diplomacy, ed. Gordon Martel (Wiley, first published May 3, 2018), https://doi.org/10.1002/9781118885154.dipl0469.
  10. Osborne, “Peace of Prague (1635).”
  11. Brázdil et al., “Weather and Climate,” 1863–1890, section 6.2. 연구는 신성로마제국 인구 추정치 자체에 상당한 불확실성이 있다고 명시하며, 지역별 손실 폭도 크게 달랐다고 정리한다.
  12. Brázdil et al., “Weather and Climate,” 1863–1890, section 6.2.
  13. German History in Documents and Images, “Peace Treaties of Westphalia (October 14/24, 1648),” accessed August 24, 2026, German History in Documents and Images.
  14. German History in Documents and Images, “Peace Treaties of Westphalia,” arts. V–VII.
  15. German History in Documents and Images, “Peace Treaties of Westphalia,” art. VIII, §§1–2.
  16. Laura Manzano Baena, Conflicting Words: The Peace Treaty of Münster (1648) and the Political Culture of the Dutch Republic and the Spanish Monarchy (Leuven: Leuven University Press, 2011), https://doi.org/10.2307/j.ctt9qdxgt; Rijksmuseum, “Ratification of the Peace of Münster between Spain and the Dutch Republic in the Town Hall of Münster, 15 May 1648,” accessed August 24, 2026, Rijksmuseum.
  17. Andreas Osiander, “Sovereignty, International Relations, and the Westphalian Myth,” International Organization 55, no. 2 (Spring 2001): 251–287, https://doi.org/10.1162/00208180151140577; Derek Croxton, “The Peace of Westphalia of 1648 and the Origins of Sovereignty,” The International History Review 21, no. 3 (September 1999): 569–591, https://doi.org/10.1080/07075332.1999.9640869.

참고문헌

  • Brázdil, Rudolf, Petr Dobrovolný, Christian Pfister, Katrin Kleemann, Kateřina Chromá, Péter Szabó, and Piotr Olinski. “Weather and Climate and Their Human Impacts and Responses during the Thirty Years’ War in Central Europe.” Climate of the Past 19 (2023): 1863–1890. https://doi.org/10.5194/cp-19-1863-2023.
  • Croxton, Derek. “The Peace of Westphalia of 1648 and the Origins of Sovereignty.” The International History Review 21, no. 3 (September 1999): 569–591. https://doi.org/10.1080/07075332.1999.96408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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